1979년 10월 16일 부산과 마산에서 대학생들이 들고 일어났다. 부산대학교 학생들이 박정희의 독재에 맞서 "유신철폐"를 외치며 시위를 시작하였고, 이는 일반시민들에게 확산되었다. 박정희는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부마항쟁의 배경
1978년 12월에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는 시민들이 납득하기 어려운 불합리한 선거였다. 그럼에도 민주화에 동참하는 의석이 늘어났고, 정부는 민주인사에 대한 연행과 투옥 등 탄압을 강화하였다. 10월 4일 집권당인 공화당은 야당의 김영삼 총재를 국회에서 제명했다. 이는 야당 국회의원 전원 의원직 사퇴로 이어졌고, 부마항쟁이 시작되었다.
부마항쟁의 전개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학교 학생 5,000여명이 교내에서 시위를 시작하였고, 저녁에 시내로 진출했다.
1979년 10월 17일, 부산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시위가 확산되었다. 충무 파출소, KBS, 서구청, 부산세무서 등이 파괴되었다.
1979년 10월 18일,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하여, 1,058명을 연행,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1979년 10월 19일, 마산대학교(현 창원대)와 경남대학교 학생 시위가 발발하였고, 민주공화당사, 파출소, 방송국이 타격을 입었다.
1979년 10월 20일, 시민, 고등학생들이 합세하였고, 마산에 위수령이 선포되었다.
1979년 10월 23일, 부산, 마산의 통금이 환원되었다.
1979년 10월 26일, 부산지역 계엄군이 철수하였고, 박정희 대통령이 죽었다.
부마항쟁의 영향
부마항쟁을 통해서 정권 내 갈등이 심화되어, 박정희의 독재 종식이 앞당겨졌다. 한편 이 항쟁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6월항쟁에 영향을 주었다.
참고 자료
위키피디아, 나무위키
다시 쓰는 부마항쟁 보고서 ,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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